사물의 운동과 노동의 물화 (2024)
남웅 (미술비평)
번뜩이는 사물의 운동
종이에 타자기로 타이핑하면 곧장 이어진 파쇄기를 지나며 실시간으로 잘려 나가는 기계가 있다. 그가 예측하지 못하는 시간 파쇄기는 작동한다. 한편 다른 시간을 가리키며 돌아가는 벽걸이 시계들이 가득 들어 있는 박스에 콘크리트를 부어 굳은 자리엔 시계 유리가 깨진 채 멈춰 있다.
극단의 운동들이 하나의 상황으로 발생한다. 한쪽에서 각인과 지속을 이끈다면, 다른 쪽에서는 지우고 파괴하기를 거듭한다. 각각의 사물은 제 기능을 하지만, 상반된 속성을 갖는 것들이 맞닿아 있거나 충돌한다. 망원경에 눈을 갖다 대는 이는 기대한 것과 다르게 렌즈로 자신의 정수리를 본다.
허내훈 작가가 고안하는 사물들이란 기존 사물에 기대할 수 있는 기능을 배신하고 어김없이 상반된 기능의 사물을 병치한다. 서로의 기능과 운동이 상충하면서 사물이 가졌던 기능은 무용해지고, 한낱 역설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소환된다. 사물에 기대할 법한 쓰임에 어긋나거나, 긴장과 불안을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아이디어의 번뜩임은, 하지만 그것이 반복하면서 단조롭고 단발적으로 제작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다시 말해 사물의 기능과 관성적인 운동을 탈주하거나 어긋나는 작업은, 거꾸로 레디메이드의 정해진 기능과 관성에 의존하지 않는가.
초기 작가는 공산품이 아닌 종이와 석고, 등의 질료로 특정한 형태의 조형을 구성했다. 〈거대한 파도〉(2014)는 부피와 무게감을 지닌 조형의 형태가 덮칠듯한 파도를 연상시키며 불안을 유발하며 심상을 시각화하지만, 그것이 어떤 배경과 인과관계를 갖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키워드를 취하고 단발적인 감각을 재치 있게 접근하지만, 저변의 배경과 맥락보다는 특정 현장과 상황에 주목하는 조형적 방법론은, 모순과 긴장의 역동을 개별 오브제에 결집하면서 산문보다는 금언(金言)과 명구(名句)를 연상케 한다. 한데 상반된 감각의 기능과 물성을 배치하는 일은 제 효과를 강조하며 사물의 배경과 내용을 지우지 않는가. 이는 앞에도 언급한 바 있는 사물에 대한 기존 기능과 인식에 의존한다는 우려와 연결된다. 분절된 채로 제각기 산재하는 오브제들은 어떻게 다시 그들을 구성하는 공백과 분절의 조형성을 비평적으로 취할 수 있을까. 이른바 맥락으로부터 분절한 오브제들을 잇는 시간성을 고려한 조형이나, 탈맥락을 맥락화하는 재구성의 시도 같은 것들 말이다.
다만 이러한 독법은 작업이 참조하는 사물성에 치우친 판단에 그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적어도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상반된 사물의 속성이 부딪히는 장면은 사용자와 관람자에게 어떤 감정과 감각적 반응을 야기하는지, 어떻게 추상적인 정동을 사물의 형태로 치환해서 구현하는지, 주어진 사물과 발현하는 감응 사이에서 주체와 사물의 위상과 위계적 관계는 배치의 변칙을 통해 어떻게 역전되거나 변화를 맞는지 살필 수 있다.
작가는 세 가지 카테고리로 작업을 설명하며 입체적으로 읽기를 시도한다. 나/우리/사물로 범주화하는 작업은,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며 어떤 해석이 가능할지 해석에 가지를 낸다. 일테면 사물에 자신의 욕망과 관성적 인식을 투사하는 자신을 관찰할 수 있고, 레디메이드 사물을 매뉴얼 대로 사용하는 이들이 어떤 문화와 습속을 공유하는가를 묻는다. 이는 곧 주체와 사물 간 위계를 재고하도록 한다. 상반된 기능의 사물들을 배치하거나, 기능에 역행하는 방식으로 변형을 가하는 방식이 사물에 관성적인 감각에 제동을 거는 일은, 사물이 더이상 도구적이고 피동적인 대상으로만 작동하지는 않음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사물 간 기능을 이접하는 방식은, 심층적으로는 감각과 지각 체계가 사물과 현상의 물질적 속성과 운동성에 의존하고 있으며 가변적인가를 환기하는바, 이는 작가가 수행해온 작업의 궤적을 통해 확인케 한다.
번뜩이는 노동의 물화
독일에서 십수 년을 보내고 돌아온 한국에서 작가는 다른 시도를 수행한다. 풍경을 잘게 잘라 재배열하는가 하면, 인공위성의 실시간 궤적을 그래프로 보여주는 화면 옆에 GPS 위치가 표시되는 지도와 길가의 화면들을 병치한다.
광학 장치에 여과된 이미지들은 넘치는 정보일 수 있고,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요소일 수 있다. 이를 온전한 아이디어로 가공해서 독립적인 오브제로 제시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오리고 연속적으로 분절된 화면을 이어내는 방식은, 분절을 다시 접합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다.
새로운 작업에 대해 작가는 ‘공해’를 이야기한다. 공간을 채우는 원치 않는 소리와 볼거리들은 독일과 다른 한국의 환경에서 정신분산적 감각에 주목하도록 한다. 이는 그간 작가가 개별의 사물을 변형하여 단편적인 아이디어를 시각화한 방식으로부터, 하나의 풍경을 분절하고 다시 접합하기를 반복하는 공정으로 옮겨낸 지점에서도 예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간의 작업이 특정 사물의 기능과 속성에 기대어 변형하고 기능을 소거하면서 사물을 둘러싼 맥락을 베어낸 채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한 소재로 사용했던 것과 달리, 그는 주어진 형상을 파괴하며 재구성하는 반복적인 수행으로 이미지를 재배열하고, 다른 이미지들을 병치하는 노고를 반복한다.
사물과 배경을 매끈하게 연결 짓기보다 자르고 이어 붙여 화면 속 풍경을 가늠케 하면서도 온전하게 지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데 수반하는 노동은, 소거된 맥락의 공백으로부터 비맥락적 맥락성을 재구성할 수 있는 응답은 아닐까. 해석을 좀 더 시도한다면, 그간 사물의 기능을 취하여 그것을 반대 항의 기능에 맞대어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거나, 특정 상황과 이슈를 일부만 취하여 재현 대상으로 삼았다면, 이번에 제작한 〈이질적 공존〉과 〈파편화된 이미지: 파괴와 재생〉은 사물의 반복적인 노동을 수행하고, 작가 스스로 기능에 어긋난 사물과 기기의 움직임을 수행함으로써 그동안 작가가 사물과 기기를 도구로 사용해 온 방법론을 비평적으로 전유하는 것은 아닌지 살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이미지를 자르고 붙이며 기계적인 노동을 수행하는 작가의 한편에는 기능을 달리하는 광학기기들이 상이한 위치를 포착한 장면을 병치한다. 사람의 감각 능력을 초과하는 기기가 시각성을 전담한다면, 부단히 이미지를 잘라내는 작가의 손은 시각적 주도력을 전도 당한 상황에 기계적 반복성을 전유하며 소음으로서 이미지를 재배치하는 것은 아닐까.
전시장에는 열거한 작업과 더불어 〈36°37°〉(2023)가 놓인다. 사람의 신장보다 조금 높은 원통형의 오브제는 인간의 체온으로 온기를 품는다. 이는 작가가 소음에 둘러싸이며 정신 분산의 상태에서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몸을 움직이길 선택하며 온전한 형상에 변형을 가하며 이미지의 소음을 생산한다면, 체온을 발산하는 오브제는 그에 대한 재응전은 아닌가 생각했다. 체온과 비슷한 온도를 품은 사물은, 외려 인간이 가져야 했을 체온을 사물에 전가하고, 그를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펼치고 있음을 환기하려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기계적 노동에 침잠하는 이가 인공의 체온을 재차 삼킬 때, 그는 제 몸과 자신을 둘러싼 사물의 세계의 혼재된 상황에서 어떻게 둘을 재편하며 변형된 산출물을 계속 제작해 나갈까.